영업맨의 깨달음
저녁 7시,
늦가을의 어둠이 깊어가는 의성읍 외곽.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곳에는
농기계 대리점이 있었다.
대부분의 불은 꺼져 있었고,
사무실 불빛만이 외롭게 켜져 있었다.
'많이 기다리셨겠구나...'
마음 한켠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오랜 영업 경험에서 배운 것이 있다면,
첫 만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밝은 에너지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내 인사에 사무실 안쪽에서
중년의 사장님이 나오셨다.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그
래도 내 인사에 옅은 미소를 지어주셨다.
"먼 길 오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사장님의 말씀에는 약간의 불편함이
묻어있었다. 당연했다.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기다리게 한 것에 대한
불만이 있으실 터였다.
나는 서둘러 제품 설명을 하는 대신,
먼저 이야기를 여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혹시 농기계는 주로 대여를 하시나요?"
"아니요, 저희는 판매만 합니다.
대여는 안 해요."
사장님의 목소리에서 전문가다운
자부심이 느껴졌다.
"아, 그러시군요. 근데 농사짓는 분들이
비싼 농기계를 직접 구매하시나요?"
이 질문에 사장님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요즘은 다들 계산을 잘 하세요.
일꾼 쓰는 것보다 기계 한 대 사두면
몇 년을 써요. 게다가..."
사장님은 잠시 사무실 서류를
뒤적이시더니 계속 말씀하셨다.
"정책자금으로 2% 저리 대출도
가능하거든요. 부담이 크지 않죠."
'아, 정책자금이라...
이거 조달청 쪽으로도 길이 있겠는데?'
머릿속에서 새로운 사업 아이디어가 떠올랐지만,
지금은 그걸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30분 정도 농기계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사장님의 얼굴이 한결 편안해지셨다.
"저녁 식사는 하셨나요?"
"아직이요."
"그럼 같이 가시죠.
여기 근처에 좋은 데가 있어요."
사장님이 데려간 곳은 한우 전문점이었다.
'아... 또 한우구나.'
속으로 살짝 한숨이 나왔다.
이번 출장 들어 벌써 세 번째 한우였다.
하지만 영업의 세계에서 고객의 선택은 곧 명령이다.
테이블에 앉자마자 사장님이 소맥을 말았다.
"요즘 젊은 분들은 소주 잘 안 하시죠?"
"아니요, 저는 괜찮습니다. 함께 한 잔 하시죠."
잔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첫 잔을 비웠다.
숯불이 들어오고,
이어서 고기가 테이블에 놓였다.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조심스레 농담을 던졌다.
"사장님, 제가 이번 출장이 나흘째인데
한우만 벌써 세 번째네요."
사장님은 고기를 정성스레 구우시며 웃으셨다.
"아무래도 시골이 도시보다 소 값이 싸죠.
도축장도 가깝고...
그래서 정육식당이 많아요."
대화는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나는 의도적으로 내 제품 이야기는 뒤로 하고,
사장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늦은 시간에 찾아온 나를 기다려주신 만큼,
오늘은 그분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우와 소주가 어우러진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근처 호프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맥주 한 잔이 테이블에 놓였을 때,
뜻밖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사실 나도 소고기를 좋아하는데...
이거 먹으면 안 돼요."
"네? 왜 그러시죠?"
사장님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소를 1kg 찌우려면 곡물이 5kg이나 필요해요.
옛날에는 소가 농사일도 도와주고 여러모로 쓸모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냥 먹기 위해서만 키우잖아요."
"아, 그래서 소값이 비싼 거군요?"
"그게 아니에요..."
사장님은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계속 말씀하셨다.
"소한테 곡물 5kg 먹일 거면
그걸 차라리 사람한테 먹여야죠.
지금도 굶주리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국가에서 소 사료 지원해 줄 돈으로
그 아이들 먹이고 입히면...
그게 진정한 나라 발전이고
환경도 살리는 길이에요."
'못 먹는 아이들...'
갑자기 가슴 한켠이 무거워졌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그래요.
아프리카만 해도 굶어 죽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그 곡식을 소한테 먹이고...
소 한 마리가 500kg 될 때까지 먹는 양이 얼마겠어요?"
인도주의...
그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단어였다.
인간의 존엄성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철학.
그동안 나는 얼마나 자본주의적 사고에만
매몰되어 있었던가.
부끄러웠다.
유니세프에 매달 몇 십만 원 후원하는 것을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내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자정이 되어갈 무렵,
우리는 각자의 숙소로 향했다.
내일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다음 날 11시,
숙소를 체크아웃하고 다시 사장님의 가게를 찾았다.
이번에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직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점심으로 사장님이 추천하신 어죽집으로 향했다.
어탕은 좀 특별했다.
기존의 선입견을 깨는 새로운 맛이었다.
흔히 떠올리는 매콤한 빨간 국물이 아닌,
맑고 뽀얀 국물에서 우러나는 깊은 감칠맛이 인상적이었다.
텁텁할 수 있는 고춧가루 대신
깔끔한 육수의 맛을 살린 정성이 돋보였다.
담백하고 구수한 국물에 생선의 달큼함이
어우러져 깊이 있는 맛을 자아냈고,
아삭한 청량고추의 깔끔한 매운맛이 더해져
해장하기에 더없이 좋은 조화를 이루었다.
곁들여 나온 반찬들도 정갈했는데,
특히 절인 청고추의 아삭함과 김치의
시원한 맛이 어탕의 풍미를 한층 더했다.
푸르른 하늘 아래 자리한 식당에서,
소박하지만 정성 가득한 한 그릇의 어탕은
마치 시골 할머니의 정갈한 손맛을 떠올리게 했다.
토속적이면서도 세련된 맛으로 재해석된 이곳의 어탕은,
전통의 맛을 현대적으로 풀어낸 훌륭한 한 끼 식사였다.
식사를 마친 후,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조심스럽게 회사 카탈로그를 꺼내들었다.
"저희 제품은 물에 희석할 필요가 없고,
자극적인 냄새도 없습니다.
요즘 락스 중독으로 사망 사고도 있잖아요?
저희 제품은 바로 사용 가능하면서도 안전합니다."
사장님은 진지하게 카탈로그를 훑어보셨다.
그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하는 것을 보니,
관심이 생기신 것 같았다. 특히
'안전성' 부분에서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현재 사용하시는 락스는 보관도 굉장히 조심해야 하고,
희석 비율도 정확하게 맞춰야 하잖아요.
저희 제품은 그런 번거로움 없이
바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사장님은 고개를 끄덕이셨다.
나는 제품의 다양한 활용성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감염병 예방관리과에서는 살균 소독용으로,
위생과에서는 식품 접객업소 관리용으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특히 어르신복지과는
노약자분들이 계신 곳이라 안전성이
매우 중요한데, 저희 제품이 딱이에요."
잠시 카탈로그를 넘기시던 사장님이 관심있게 물으셨다.
"농업 쪽은 어떻습니까?"
"네, 농업기술센터의 축산과나 농업과에서도
아주 유용합니다. 가축 질병 예방에도 효과적이고,
농작물 관리에도 탁월해요.
특히 무농약 재배 농가에서 많이 찾으십니다."
설명을 들으시던 사장님은 카탈로그를
다시 한 번 꼼꼼히 보시더니, "카탈로그 몇 부 더 주실 수 있나요?
그리고 샘플도 한번 써보고 싶은데..." 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네, 다음 방문 때 샘플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실제로 사용해보시면 그 차이를 확실히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사장님의 반응이 긍정적이었다.
20년 영업 경험으로 봤을 때,
이런 반응은 대부분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
다만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신뢰를 쌓아가는 것이 중요했다.
몇일 후,
모든 출장을 마치고 본사로 돌아와,
나라장터 종합쇼핑몰 공고를 검색해보았다.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농기계 발주가 연간 2,500대.
대당 1,000만 원만 잡아도 연 발주액이 250억이었다.
'제조사와 독점 계약만 성사되면...'
새로운 사업 구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어려운 과제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당연히 의성의 사장님과 함께하는
윈윈 전략으로 구상했다.
나는 평소 나를 도와주시는 분들과는
항상 정직하게 이익을 나눈다.
단순히 소개해주고 식사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실제 수익이 발생하면 정당한 몫을 나누는 것.
그게 바로 상도이자 자본주의의
진정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의성에서의 미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오후 2시,
나는 제천으로 향했다.
가슴 한켠에는 새로운 희망과 함께,
어제 들었던 인도주의적 가치에 대한
깊은 울림이 남아있었다.
때로는 영업이 단순한 물건 판매가 아닌,
새로운 깨달음을 주는 스승이 되기도 한다.
의성에서의 하룻밤은 그런 소중한 경험이었다.
'제천에서는 또 어떤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을까?'
차량이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나는 이미 다음 미팅을 위한 시나리오를 그리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미팅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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